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비 바르부르크 (문단 편집) == [[쇼미더머니]]!!! == 아비 바르부르크는 연구활동에만 머무르지 않고, 자신이 수집한 온갖 종류의 문헌들을 보관하고 계속해서 수집해나가면서, 동시에 젊고 유망한 학자들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했다. 그래서 둘째동생 막스 바르부르크를 찾아가 장자상속권을 포기하는 댓가로 자신의 프로젝트에 돈을 댈 것을 제안하여, 바르부르크 문화학도서관(Warburg Kulturwissenschaftliche Bibliothek[* 독일어 Kulturwissenschaft는 과학으로서의 [[인문학]]을 지칭하는 용어지만, 이상하게 한국에서는 '문화학'이라는 새로운 학제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되곤 한다. 영미권에서는 Human Science로 번역하고, 일본에서는 문화학이라고 번역한다. 아무래도 일본의 번역어를 그대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.])을 건립하는데 이것이 [[바르부르크 연구소]]의 시작이었다. 도서관을 설립한 후, 아비 바르부르크는 장서수집과 함께 도서관을 관리하고 연구에 종사할 학자들을 긁어모으기 시작한다. 이 시기에 바르부르크 도서관에 들어온 학자로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--노예-- [[프리츠 작슬]][* 고령에 몸이 좋지 않던 바르부르크 대신에 도서관의 살림살이를 책임졌던 인물이다. 훗날 바르부르크 도서관을 함부르크 대학의 부속기관으로 만들었고, 1933년 나치의 등장과 함께 도서관을 런던으로 옮기는 것을 주도했다.]과 철학자 [[에른스트 카시러]], 그리고 [[에르빈 파노프스키]]가 대표적이었고, 훗날 [[언스트 곰브리치]] 역시 이 도서관의 일원으로 합류한다.[* 곰브리치가 합류한 것은 이 연구소가 런던으로 옮긴 뒤인 1936년이긴 하다.] 이게 뭐가 대단한 일이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, 아비 바르부르크는 어디에 소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학자를 추구했기 때문에 대학에서 일하지 않았을 뿐더러, 도서관을 만들면서 자신의 사재[* 물론 동생에게 받은 거지만]로 도서관을 설립한 것이다. 장서의 수집 뿐만 아니라 연구원들의 생계(..)도 자신이 책임졌다는 소리다. 게다가 이 도서관을 만들 당시 바르부르크의 나이는 26살(...)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